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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일기

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내온 밤 - 김연수

오랜만에 김연수의 에세이라 냉큼 사서 읽어 내려갔는데, 이번 책은 희한하게 계속 삐걱거렸다. 앞에는 정말 좋았는데 중간중간에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계속 놓치고 다 읽고 감흥도 그닥. 몇 개는 아주 좋았지만 어떤 편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변했나. 다만 특유의 의뭉스러운 문체는 여전해서 그 맛에 즐겁게 읽어 내려갔긴 함. 뒤로 갈수록 좀 힘들었음. 나중에 꺼내서 다시 읽어보면 다른 느낌이겠지.

10년가량 써놓은 일기를 대량 방출한 듯한 구성이다. 그당시 굵직한 사건들에대한 그의 생각, 편린도 엿볼 수 있다. (세월호라던가. 세월호라던가.) 마지막 편은 짧은 단편소설인데, 이것은 연애후일담 같기도 하고, 아주 좋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읽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라. 대신에 날마다 쓰고, 적어도 이십분은 계속 써라. 다 쓰고 나면 찢어버려도 좋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체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이것이 바로 "일기,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 나오는 일기 쓰기 지침이다. 이렇게 하면 글을 자주 쓰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주 쓰면 많이 쓸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잘 쓰게 된다.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잇사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이 하이쿠는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처참한 파괴 현장 사진과 함께 가장많이 인용되었다. 이 지옥같은 세상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노년이란 온전히 자신으로만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실패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대도 괜찮아. 늙은 뒤에도 기회는 생겨. 그녀의 삶은 내게 그런말을 들려주는 듯 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타인에 대한 윤리의 부재, 이는 물론 "내 집, 내 가족, 내 돈과 내 일이 아니면 어디에도 마을 쓸 시간을 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크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세계는 늘 그대로 거기 있다. 나빠지는게 있다면 그 세계에 비친 나의 모습일 것이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의문은, 그렇게 해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나의 올바른 사용법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배움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육체적으로 버거운 과제에 도전 하는 게 제일 좋다. 일단 우리가 몸을 얼마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면 마음의 오용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습해 일 년 안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연주하는 일이었다.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뭔가에 몰두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은 옳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일..습관적인 행동에서 벗어나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보고, 나만은 옳게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여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과정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 연습하는 부분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에 몰두하며 매일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책을읽을 때는..자신은 옳게 알고 있다는 그 느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는 일을 뜻할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주는 것보다 받아야할 것이 더 많은 셈이다. 관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지 못하더라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다행히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만틈 타인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이 지체의 시간이 나는 좋다.
아름다움의 경험은 여기에서 나는 영주할 수 없는 존재, 그러니까 임시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