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의 시칠리아 - 김영하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다. 오래전에 출판했던 책인데 작가의 히트작 '여행의 이유'가 제법 인기를 끌게 되면서 재편집해서 나온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이유가 어찌됐건 몰랐던 좋은 책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시칠리아를 따로 가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여행 좋아하는 아는 후배가 친구들과 시칠리아만(!) 여행하고 왔다는 이야기에 급 호기심이 생겼더랬다. 단순히 지중해 한가운데 큰 섬이라 아프리카, 그리스, 로마유적이 가득 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아 바이킹도 여기에 왕국을 세웠었지) 무려 제주도보다 14배 크고,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로 유명한 이탈리안 마피아의 고향. 나라밖을 한치도 못나가는 지금 문득 가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더더욱. 김영하가 장담하건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가보자. 아마 이탈리아 여행 다 하고 나서 한참 뒤일듯 싶지만.
이 책이 나오던 해에 아이폰이 우리나라에서 출시된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렌터카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다. 우리는 종종 이상한 길로 접어들어 헤맸고 일정에도 없던 곳에 가서 머물렀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된 지 십 년, 이제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내게는 '과거의 내가 보내온 편지' 같은 책이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 같은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언젠가 시칠리아로 떠나게 될 것이고, 장담하건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시칠리아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았다.
"안녕Adios"이라고 말하자 택시기사 빌리니씨는 고개를 저으며 "안녕이라고 하면 안 되지. 다시 만나자 Arrivederci" 라고 말했다.
리파리를 떠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선장수 프란체스코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레 내밀던 젖은 주먹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다시 리파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술은 가능하면 언제나 그 지역의 것을 먹는다는 게 내 원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에서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떄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간단한 가사를 꼐속하여 반복하던, 그래서 신입생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그 응원가는 이렇게 끝난다. 그래여, 그대여어어,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
구시가인 오르티자로 들어가면 아르키메데스분수가 방문자를 맞는다. 그렇다..그가 "유레카"를 외치며 욕조에서 뛰어나간 곳도 바로 여기다..제과점에는 유레카과자도 있다. (시라쿠사)
그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ignora, prego, E 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