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없는거 아닌가? - 장기하
팬심으로 읽은 장기하의 에세이.
처음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커피를 들었을때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궁상의 끝을 보여주는 자취생활 남자를 묘사하는 극사실주의 가사(장기하는 자취를 해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인터넷유머에 회자된다지)나 과히 조선 그루브라 부를 수 있을 특유의 사운드. 특히 그 읊조리는듯한 랩도 아닌것이 타령도 아닌 그 무엇을 들었을 때 킥 실소를 터뜨린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도 가사가 정말 좋았고, 별일없이 산다도 가사가 예술이었다. 한국어를 잘 다루고 잘 쓰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 가사의 글맛을 기대하며 읽어내려갔다. 특히 장기하스러운 저 제목. 상관없는 거 아닌가? ㅎ
금세 다 읽고난 후 얘기해보면 물론 아주 훌륭하지만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장기하인데! 너무 평범하다 싶었다. 에세이는, 특히 셀럽의 에세이는 우리가 몰랐던 업계의 뒷얘기 등 글의 제재나 특유의 글맛으로 읽는 건데 기대했던 것보다 제재도 평범하고 글도 무난무난 했다. (다 읽지 못해 글로 남기지 못했지만 며칠 전에 김훈의 연필로 쓰기를 읽고 나서인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똥얘기를 해도 이렇게 더럽고 재미있게 하는데!)
하지만 읽을수록 재미있다. 하루키의 에세이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평범한 얘기를 이리저리 엮어서 마침내 글을 완성하는 솜씨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고 솔직함이 돋보이는 글들이 많다. 옆에서 조곤조곤 얘기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미 이것 저것 대충 이뤄낸 사람이라 그런가 원래 초연한 사람인가 인생을 달관한 태도도 부럽기 그지없다. (그의 가사같이)
십여 년 전 피아노 앞에서 떨쳐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나는 지금 다시 떨쳐내려 하고 있다. 그떄는 후회였지만 지금은 후회라기보다는 좌절감이다. 뚜렷한 대상은 없지만 열등감이기도 하다. 아마도 내가 바라는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일 터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종류의 감정은 후회보다도 더 쓸모가 없다. 그야말로 백해무익이다. 어쩌면 예전에 내가 떨쳐냈던 것도 후회를 가장한 열등감이었는지 모른다. 음악을 하고 싶은데 실력이 모자란 데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열등감은 쓸모없고 말고를 떠나서, 후회만큼 쉽게 씻겨나가지는 않는 감정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좀 열등하다 해도 별로 상관없고,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여태껏 살면서, 멋진 순간들은 다 내 의도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왔다.
나는 다시 한번 망망대해 위의 서퍼를 떠올린다. 대단한 항해를 계획하지 않아도 파도는 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파도를 맞이하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푸른 바다 위를 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십대와 사십대는 마치 아프리카와 아시아처럼 다른 문화권인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 이사를 왔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