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 이지수
올해의 아무튼 시리즈 여덟번째 책 되겠다.
이번엔 하루키. 하루키가 좋아서 일문과에 진학했고, 지금은 일본어 번역을 업으로 하고 계신 작가의 하루키를 빙자한 자기 얘기. 재미있다.
나도 동아리방에서 굴러다니는 '상실의 시대'를 필두로 여러 권을 읽었드랬다.
글을 잘 쓰고,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건 알겠는데 현실과 환상을 무심하게 넘나드는 특유의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몰라서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 (양을 둘러싼 모험, 해변의 카프카, 다자키 스크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등 생각해보니 몇 권 안 읽었군.) 그에 반해 에세이는 너무도 취향이라 (누구나 그렇겠지만) 여행갈때마다 사가지고 읽고, 또 보고 했는데 이것도 반복되니 이제 지겹다 싶다. 나도 나이가 많이 먹었고. 요새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있는데 이건 또 참 재미있네.
암튼 하루키를 좋아하는 분의 글을 읽고 있으면 뭔가 하루키를 읽는 거 같음.
외국에서 지내는 것의 메리트 중의 하나는 자기가 단순히 한 사람의 무능력한 외국인,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 가령 약자로서 무능력한 사람으로서, 그런 식으로 허식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혹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져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귀중한 경험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루키 - 이윽고 슬픈외국어)
결국 우리의 연애도 지극히 평범했다는 사실을 글로 정리함으로써 뒤늦게나마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재의 내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과거를 미화하고 거기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기기 위해.
어째서 육아는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일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여태 없었을까. 분명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모종의 엠바고 같은 거겠지.
그들의 말투는 대체로 단호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때로는 조심성과 배려심으로 인해 자기가 내뱉은 문장의 궤도를 여러 차례 더듬더듬 수정한다. “삼겹살 좋아하시죠? 제가 괜찮게 하는 집을 아는데 거기 가시죠”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혹시 삼겹살 좋아하시나요? 어, 만약 채식을 하신다면…”이라고 말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봇물 터진 듯이 “MCU에서 이 캐릭터의 의의는 말이야, 아, MCU라는 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약자인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아니라 “영화 어땠어? 응, 그 신 참 좋았지”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농구나 축구를 한 뒤 와글와글 단체로 회식하는 것보다 혼자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는 데 행복을 느낀다. 요컨대 얼핏 보기에는 내성적이고 고독한 소년 같지만 함께 있으면 그 다정함이 서서히 배어나는 사람, 자신에 대해 큰소리로 떠벌리지 않아도 그 내부에는 틀림없이 근사한 게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에게 나는 매번 반한다.
이제 열페이지 남짓 읽고 방치해두고 있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어야지 (이거 올해 초에 비슷한 글을 썼던거 같은데!)
#2024#책#48